‘나, 다니엘 블레이크’
‘나, 다니엘 블레이크’
서울시 도봉구 공무원들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단체 관람했는가 보다. 아마도 공무원들의 ‘관료적 행태’에 대한 교육 차원에서 이뤄진 행사라 여겨지는데, 글쎄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본질이 관료사회에 대한 비판일까.
사실 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는 내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이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공고해진 사회에서 소외받은 전형적인 인물이었거니와 사회보장제도는 많지만 정작 필요로 하는 사람은 소외시키는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보장 제도의 본질을 켄 로치 감독이 영상으로 끊임없이 환기시켰기 때문이었다. 자본(돈) 중심의 엄격한 사회제도, 그리고 공동체 붕괴(쓰레기 봉투 처리, 정원의 개똥 사건 등)는 물론이거니와 ‘인정’에 의한 약자들의 연대(다니엘이 몇 분 늦게 도착하여 사회보장제도를 신청 못하게 된 케이티에게 자신 순번을 양보하려고 하다가 쫓겨나는 장면 등)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모든 걸 자기 혼자 힘으로 처리해야만 하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자본주의 도시의 풍경을 켄 로치 감독은 리얼하게 묘사했다.
결국 이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와 ‘인간 존엄성’이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다니엘은 항소하면 길거리에 나 앉게 될 거라며 만류하는 공무원의 손길을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거요”라는 말로 뿌리친다. 다니엘 블레이크를 일인 시위에 나서게 하고 항소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존엄성’ 문제였다. 자기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니까.(“I'm a man, I'm not a dog.”) ‘개’나 ‘돼지’는 비단 한국사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이 고도로 발전한 영국사회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애초부터 한낱 장식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다니엘의 목공 모빌이다. 그는 생계를 위해 자신이 만든 가구를 판매상에게 팔아 넘겼지만 목공 모빌만은 남겨 놓았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신의 창조적 노동을 통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목공 모빌은 산만한 케이티의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평온함을 되찾는 도구가 된다. 켄 로치는 그 목공 모빌을 통해 ‘창조적 노동’이 가능한 세상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